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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병장 조헌 장군의 위업을 서리서리 풀어내는 마을의 정자나무 날짜 2021.10.09 18:07
글쓴이 고규홍 조회 361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의병장 조헌 장군의 위업을 서리서리 풀어내는 마을의 정자나무

  비를 피해 느티나무 그늘의 평상에 주저앉았습니다.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여 일기예보를 꼼꼼히 살피고 떠난 길이었는데, 비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흐리긴 해도 비는 오지 않을 것’이라던 어젯 밤까지의 일기예보는 아침 되어 바뀐 모양입니다. 나무와 함께 비에 젖는 일이 그리 나쁜 건 아니지만, 오늘 하루 중의 답사로 예정했던 나무들의 상당 수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모양입니다. 우산 없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비를 맞으며 나무를 바라보다 그냥 나무 그늘의 평상에 잠시 머물러 《나무편지》 띄웁니다. 아마도 지금 써서 월요일 쯤에는 사진을 덧붙이고 html 코딩 작업을 해서 한글날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는 화요일 아침에 띄우게 되겠지요.

○ 경기도에서 태어나 충북도 보은 옥천 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 ○

  여기는 충청북도 보은군 수한면입니다. 평상 위로 무려 30미터 가까이 나뭇가지를 펼친 나무는 〈보은 차정리 느티나무〉입니다. 충청북도 보은군 수한면 차정리(車井里)는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나무 앞 동쪽으로는 조붓한 도로가 면하고 있으며 그 건너로는 항건천이라는 제법 큰 개울이 흐릅니다. 항건천은 수한면에서 시작해서 보은읍에서 보청천과 합류하는 강입니다. 그리고 나무를 둘러싸고 오붓한 살림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의 동쪽으로는 근사한 사당이 한 채 눈에 들어옵니다. 1976년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보은 후율사입니다.

  보은 후율사(報恩 後栗祠)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헌(趙憲, 1544~1592)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그가 율곡 이이의 후진이라는 뜻에서 후율사라고 이름붙였다고 합니다. 조헌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조선 전기에 조선전기 공조좌랑, 전라도도사, 보은현감을 지냈지만, 보은 지역과 바로 붙어있는 옥천 지역과 관계가 깊습니다. 그가 보은 지역과 처음 관계를 맺은 것은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보은현감을 자청하여 나간 1582년부터입니다. 마흔이 채 안된 그대 그의 치적은 당시 충청좌도 지역에서 으뜸으로 꼽혔을 정도로 자자했다고 합니다.

○ 청주성 수복 뒤에 강제해산 당한 의병부대가 전몰한 금산전투 ○

  우여곡절을 적잖이 겪은 뒤에 결국은 벼슬에서 물러난 조헌은 보은과 붙어있는 옥천지역에서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던 중인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조헌은 옥천 지역에서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 1,600여 명을 모아서 분연히 전장에 나선 겁니다. 그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청주성을 수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 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던 중에 전라도로 진격하던 왜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고 맙니다.

  조헌 장군이 장렬이 산화한 전투를 ‘금산전투’라고 부르고 지금의 보은 후율사는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700여명의 의사(義士)와 그를 기리기 위해 숙종 때 세운 것이라고 전합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보은 후율사도 헐리고 맙니다. 하지만 마을 선비들은 얼마 뒤인 1894년부터 무너앉은 후율사 옛터에 단을 모으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게 오래 이어지고 1928년에는 건물을 새로 짓는 등 중건하여 조헌과 함께 순절한 의사 20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게 지금의 보은 후율사입니다.

○ 조헌 장군의 말을 매어두었다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느티나무 ○

  나무 그늘에 들어서서 나무 이야기는 시작도 않고 나무 곁의 사당 건물의 내력만 이야기하고 있네요. 그도 그럴 것이 〈보은 차정리 느티나무〉가 조헌 장군과 관계 있는 나무일 뿐 아니라, 나무의 소유주도 ‘보은 후율사’로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은 차정리 느티나무〉가 품은 사람살이 이야기의 모든 것은 보은 후율사와 조헌 장군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의병을 일으키고 죽는 날까지 이 지역에서 활약했던 조헌 장군은 의병장 시절에 이 마을을 자주 지나쳤다고 합니다. 마을 주변에 크고 작은 산들이 이어지는 까닭에 장군과 의병들은 고개를 넘어 이 마을 쯤에 이르면 무척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이 마을은 결국 의병들의 쉼터가 되었던 겁니다.

  특히 〈보은 차정리 느티나무〉는 조헌 장군이 타고 다니던 말 고삐를 매어두고 말과 함께 쉬던 나무였다고 전합니다. 사실 나무에 얽힌 조헌 장군의 이야기는 이게 전부입니다. 별 다른 이야기가 더 있는 건 아닙니다. 그 시절에 말을 매어두는 데 쓰였던 나무가 한두 그루이겠습니까. 그러나 특별히 조헌 장군의 말을 매어두었던 나무라는 건 마을의 자랑이었던 거죠. 그런 경우는 우리나라의 다른 나무에서도 적잖이 찾을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쉬어갔다는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를 비롯해 조선의 임금 인조가 말을 매어두어서 ‘인조의 계마행’이라고 부르는 〈담양 후산리 은행나무〉가 있고, 그밖에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큰 인물의 자취를 품은 나무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 충북도 보은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 된 느티나무 ○

  모두가 나무 한 그루에 남은 사람의 발자취를 유난히 자랑스러워 한 까닭이겠지요. 임진왜란도 조헌 장군도 현대의 대한민국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흐릿해졌지만, 나무만큼은 오래오래 사람살이의 자취를 기억하고 남아있을 겁니다. 지금 나무를 더 살갑게 더 오래 보존해야 할 까닭입니다. 아하 그러고 보니, 나무의 규모도 이야기하지 않았네요. 나무는 보은군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로 나무 나이는 칠백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나무 높이는 이십사 미터이고, 사람 가슴높이에서 잰 줄기둘레는 칠 미터 가까이 됩니다. 그리고 나무가 펼친 나뭇가지는 사방으로 거의 삼십 미터에 이를 정도로 넓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나무임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는 나무입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추적추적 안개처럼 습기처럼 나무 곁의 공기 중으로 스며들었다가 흩어지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나무 답사는 무척이나 축축해지겠지요. 그래도 가을비 머금은 나무의 촉촉한 잎새를 한껏 바라보면서 즐거이 다니겠습니다. 노트북 컴퓨터를 여민 뒤에는 〈보은 차정리 느티나무〉가 긴 세월 동안 품은 사람살이 이야기를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바로 곁에 있는 ‘보은 후율사’로 옮겨가겠습니다. 지금은 한글날 연휴 전날 이른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

- 10월 8일 비 오는 큰 나무 그늘에서 쓴 편지를 12일 아침에 띄웁니다.
솔숲(http://www.solsup.com)에서 고규홍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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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신명기 (2021.10.13 16:27)
늘 나무와 얽힌 이야기가 더 가슴에 와닿습니다.
조헌과 의병 이야기, 빠지지 않는 일본.
후율사라는 이름 자체를 처음 들은 것이 조금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정도네요
그분들은 그당시 어떤 '의'로 죽음까지 각오하고~
서울은 오늘 드디어 맑은 하늘이 가을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규홍 (2021.10.15 08:47)
그러게요. 우리나라의 오래된 나무라는 게 대략 500년 쯤 된 나무라고 친다면, 그 나무들이 대개는 임진왜란을 비롯한 일본과의 관계를 기억하는 나무들이기 십상이고, 그 나무와 더불어 살아간 사람들의 한많은 사람살이가 함께 기억되고 가슴에 와닿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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