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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북 의성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 가문을 지켜온 나무 날짜 2020.11.02 12:09
글쓴이 고규홍 조회 121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경북 의성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 가문을 지켜온 나무

  산 아래 계곡에 구름이 감도는 것처럼 보여 산운(山雲)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의성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의 집성촌,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가 그곳입니다. 산운마을은 조선 중기에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1609)이 처음 자리를 잡은 뒤로 지금까지 영천 이씨 후손들이 살림살이를 이어가는 아늑한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영천이씨의 종택인 경정(敬亭)종택과 작은 종택이랄 수 있는 자암종택(紫巖宗宅)을 비롯해 학록정사(鶴麓精舍), 점우당(漸于堂), 운곡당(雲谷堂), 소우당(素宇堂) 등 40동이 넘는 고택이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조선 선조 이후의 혼란기를 살았던 시인 이민성 ○

  마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경정종택은 이광준이 처음 짓고, 그의 아들 이민성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집을 처음 지은 이광준의 호를 따서 학동종택이라 하지 않고, 그의 아들인 이민성의 호를 따서 경정종택이라고 한 건 좀 야릇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선 선조 때부터 광해군을 거쳐 인조 시대까지의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1570∼1629)은 외교관 자격으로 중국에 두 차례 다녀온 바 있으며, 1천2백 편이 넘는 시를 남긴 유명한 문장가이기도 합니다.

  바깥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침략전쟁이 있었고, 안으로는 인조반정의 혼란에 휩싸인 시대를 살았던 이민성은 일곱 살 때부터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열아홉의 나이에는 아버지 이광준과 친분이 깊었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김성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민성이 자신의 호를 ‘경정(敬亭)’이라 한 것은 퇴계 이황이 강조한 공경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다짐이었지 싶습니다. 선조 때부터 벼슬자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지낸 이민성은 인조반정 뒤에 형조 참의를 지내기에 이르렀지요. 정묘호란(1627년) 때에는 이 지역의 대학자인 여헌 장현광의 추천으로 좌도 의병대장으로 천거되어 활동하기도 했고, 전란이 끝난 뒤에 고향 의성으로 돌아와 은거한 매우 활동적인 선비였습니다.

○ 선비의 가문을 상징하며 수백 년을 살아온 한 그루의 나무 ○

  이민성의 살림집이었던 경정종택은 한국전쟁 당시에 모두 불에 타 무너앉았습니다. 그때에 살림집의 부속건물이었던 사당이 겨우 남았는데, 이를 중심으로 살림집을 복원해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 모습대로 복원한 대문에는 지금 살립을 이어가는 후손인 이윤구(李允求)씨의 문패와 우편함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옛 대문 옆으로 언제나 활짝 열어젖혀두는 현대식 대문이 실제 출입문입니다. 아무래도 옛날 방식의 대문으로는 자동차도 드나들 수 없고, 이 즈음의 생활방식에는 불편하겠지요.

  경정종택 대문 앞에는 한 그루의 듬직한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지정번호 11-13-12의 산림청 보호수인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입니다. 이 자리에 서서 350년 쯤 살아온 이 회화나무는 높이가 15미터 쯤 되고,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5미터나 되는 큰 나무입니다. 나무의 나이를 정확히 측량하기는 어렵지만, 이민성이 이 집에서 살림을 이어가던 때보다는 조금 뒤입니다. 분명 선비 가문의 종택을 상징하기 위해 표지수로 심은 나무인 건 분명해 보이는 나무입니다. 아마도 이민성의 후손 가운데에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이 심은 나무이겠지요.

○ 연대에 맞지 않는 전설이 상징으로 살아남아 ○

  이 나무에는 “조선 선조 때 좌승지 이경형이 과거 급제하여 귀향시 수행원이 나팔을 가지에 걸려하자 가지가 저절로 휘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에 맞지 않아 헷갈립니다. 우선 선조 때에 좌승지를 지낸 이경형이라는 사람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부터 그렇고요. 또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의 재위 시절이 서기 1567년부터 1608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4백 년쯤 전인데,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는 350년 된 나무이니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물론 나무의 나이를 잘못 측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400년 전에 이 회화나무가 이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설에서처럼 나팔을 가지에 걸려 했다면 꽤 큰 나무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때에 적어도 100년쯤, 혹은 적어도 50년은 넘어야 하는 나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략 500년쯤은 되어야 앞뒤가 맞겠지만,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는 얼핏 봐도 그 수령을 5백 년 정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산림청 보호수 기록대로 대략 350년 정도의 수령으로 보는 게 적당해 보입니다.

○ 전설의 과학적 사실여부보다는 상징과 비유에 초점을 ○

  우리나라의 나무에 얽혀 전해오는 전설 가운데에는 이처럼 사실에 맞지 않는 이야기는 적지 않습니다. 하긴 전설을 놓고, 과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이치를 따지는 건 그리 옳은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전설이든 신화든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와 상징으로 사람들의 살림살이에 꼭 필요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니까요. 그래도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임금이나 관련 인물의 이름을 정확히 끄집어내는 전설일 경우에는 조금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경정종택의 건축 연대보다 조금 늦은 350년 전쯤에 심어 키운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의 상태는 그리 건강하다고 하기에는 좀 모자란 편입니다. 줄기 아래 쪽은 이미 오래 전에 썩어 동공이 생겼고, 그 자리를 충전재로 메운 외과수술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 밖에도 곳곳에 나무 줄기 껍질 부분이 썩어 치료한 흔적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 가문의 상징으로 상징으로 살아남은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가 더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 사람살이의 자취를 상징으로 남긴 나무를 생각하며 11월 2일 대낮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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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신명기 (2020.11.04 09:24)
동공이 생긴 곳에 충전재를 넣고 생을 이어가고 있는 나무를 보면서
요즘 모든 노인들이 가야하는 요양원 내지는 요양병원이 떠올랐습니다.
그분들도 동공이 생긴 것이겠지요.
멀쩡하게 들어가도 죽어야 나온다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이야기를 접하면서
사는 게 무엇인지 안타까웠는데
충전재로 속을 채우고 살아가는 나무이야기를 읽으니
어쩌면 사람이 나무만큼도 존중받지 못하고 마지막 가는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찬바람 부는 가을이 되어 마음이 허해지는 것도
일종의 동공이겠지요~~
교수님 글로 그 동공을 충전재로 채울 수 있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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