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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단한 사람살이 한가운데에서 치유와 위안으로 남은 나무 날짜 2020.08.29 19:00
글쓴이 고규홍 조회 200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고단한 사람살이 한가운데에서 치유와 위안으로 남은 나무

  지난 번 《나무편지》에서 소개한 〈괴산 읍내리 회화나무〉 곁에는 이 지역의 상징이랄 수 있는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청안 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 우뚝 서 있는 천 년 된 나무입니다. 천년이라는 수령은 우리나라 안에 살아있는 모든 은행나무, 아니 모든 나무를 통틀어서도 가장 오래 된 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령에 관하여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매우 오래 된 나무인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괴산 읍내리 은행나무〉는 규모로 보아, 가장 큰 은행나무는 아닙니다. 높이 17미터에 가슴높이 둘레는 7미터 쯤 됩니다. 이 정도면 다른 커다란 은행나무와 견주어 이야기할 때에는 ‘아담하게 큰 정도’라고 이야기해도 됩니다.

○ 고려 때 어진 사또가 마을 사람의 평안을 위하여 ○

  〈괴산 읍내리 은행나무〉는 이 지역에서 ‘천년 은행나무’로 불립니다. 나무가 들어 앉아 있는 청안초등학교의 다른 이름이 “천년 은행나무 학교”인 것도 그래서입니다. 천년 은행나무 학교, 청안초등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있는 〈괴산 읍내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65호입니다. 괴산 오가리 느티나무를 비롯해 괴산 지역 안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여덟 건(여덟 건 가운데 하나는 태풍 볼라벤의 피해를 받아 쓰러져 지금 해제됐습니다)의 식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무를 처음 심은 사람은 바로 고려 성종(981-997)때 이 고을에서 사또를 지낸 어진 정치인이었다고 합니다. 백성의 살림살이를 세심하게 돌아보던 그는 고단하게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이 쉽게 찾아와 평안하게 쉬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을 짓고 싶었습니다.

  여러 생각 끝에 그는 너른 연못을 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연못 가장자리에는 연못을 찾아와 쉬려는 사람들에게 상쾌한 그늘을 지어줄 나무를 심기로 했지요. 그리고는 곧바로 지은 연못에 ‘청당(淸塘)’, 그러니까 ‘맑은 연못’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물론 처음의 생각대로 연못 주변에는 나무를 여러 그루 심었습니다. 〈괴산 읍내리 은행나무〉는 그때 심은 나무들 가운데 한 그루라고 합니다. 결국 이 은행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자상하게 살피던 어진 사또가 ‘고단한 삶의 치유’라는 의미로 심은 나무입니다. 사람들은 사또의 마음이 고마웠고, 그가 이 고을을 떠난 뒤에도 나무와 연못을 정성껏 지키며 지금에 이른 겁니다.

○ 사람들의 정성에 이어 ‘나무 지킴이’로 나타난 귀 달린 뱀 ○

  사람들의 뜻대로 무성하게 잘 자라던 이 은행나무를 둘러싸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괴상한 이야기가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무 줄기 안쪽에 늙고 큰 뱀이 산다는 겁니다. 그것도 평범한 뱀이 아니고, 귀가 달린 야릇하게 생긴 뱀이라는 겁니다. 말로만 들어도 흉측해 보이는(생각하기에 따라 코믹해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만) 귀 달린 뱀이 마을 사람들을 도와 나무 지킴이가 되었다는 거지요. 귀 달린 뱀은 나무 줄기에 또아리를 틀고 살면서, 나무에 해꼬지하는 사람들에게 큰 벌을 내린다고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새로 나무 지킴이가 된 귀 달린 뱀의 정성으로 나무는 큰 탈 없이 천년을 이 자리에서 살아온 것이랍니다.

  몇 해 전, 이 나무를 찾아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잡지에서 제가 ‘나무 답사 1번지’로 꼽은 괴산의 큰 나무들을 함께 취재하기 위해 찾은 때였습니다. 잡지 취재팀과 함께 나무 주변에서 긴 시간 동안 머무르니,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쪼르르 제 곁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들에게 ‘귀 달린 뱀’의 존재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당연히 안다고 했지요. 이어서 “그 뱀이 무섭지 않냐”고도 물었어요. 전설 속의 귀물을 믿을 리 없는 이 즈음의 아이들은 그러나 그 이상하게 생긴 뱀은 나무만 지켜주는 게 아니라, 착한 아이들도 지켜주는 나무여서 무섭지 않다며 깔깔거렸습니다.

○ 나무 곁에 새로 지은 옹색하지만 아름다운 뜻을 가진 연못 ○

  지난 주에 나무를 찾아갔을 때는 방학 중이어서, 그때처럼 아이들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은행나무 곁에 한 가지 변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은행나무와 학교 정문 사이의 옹색한 귀퉁이에 작은 연못이 새로 생긴 겁니다. 최근에 새로 조성한 작은 연못, 사실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참 옹색한 규모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못은 연못입니다. 천년 은행나무 학교에서 예부터 전해오는 어진 사또와 은행나무의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 새로 지었다는 게 학교 지킴이 선생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천년 동안 사람들에게 치유의 상징으로 살아온 나무가 전설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다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과 함께 위로와 치유의 상징으로 남게 된 겁니다. 치유의 나무와 연못 곁에서 도담도담 자라날 아이들의 맑은 눈빛이 선하게 그려지는 풍경이었습니다.

  하나의 태풍을 겨우 보냈는데, 곧바로 또하나의 태풍이 올라온다네요. 당장에 찾아나서야 할 나무들이 적지 않은데, 참 여러 가지로 발목을 잡힙니다. 긴 장마에 바이르스와 태풍으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세상 이야기에 도무지 정신 챙기기가 쉽지 않은 날들입니다. 원고 출고도, 강연도 비대면으로 충분히 가능하지만, 나무만큼은 비대면으로 만날 수 없어 안타까움만 첩첩 쌓으며 《나무편지》 올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모두 평안하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 다시 또 기상청 예보에 눈과 귀를 기울이며 8월 31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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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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