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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땅의 모든 바람을 처음 불러 일으키는 한 그루 나무 날짜 2019.09.21 20:19
글쓴이 고규홍 조회 285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이 땅의 모든 바람을 처음 불러 일으키는 한 그루 나무

  추석 명절 전에 미리 말씀드렸듯이 오늘, 이 아침의 《나무편지》에서는 우리 사는 이 땅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워낙 잘 알려진 나무여서 굳이 새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게 군더더기로 들리실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언제 다시 이야기한다 해도 결코 넘치지 않는 나무이니까요. 나무의 규모부터 짚어보지요. 이 은행나무의 높이는 무려 42미터나 됩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모든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큰 높이입니다. 14미터나 되는 가슴높이 둘레 역시 우리나라 최고의 규모이지요. 실제로 보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나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나무입니다.

○ 신라 패망의 한을 품고 살아온 천년 은행나무 ○

  이 큰 나무는 신라가 멸망한 때에 심은 나무입니다. 천 백 년 쯤 전인 935년(경순왕 9) 10월 신라는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의 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했지요. 이때 경순왕의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했어요. “고립되고 위태로운 사정이 심각하여 나라의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더 이상 약해질 수도 없는 상황이다.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라는 게 《삼국사기》에 전하는 태자의 감회였습니다. 하지만, 고려에 스스로 복종하겠다는 뜻의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전달되었고, 결국 태자는 통곡하며 세속을 떠나기로 결정한 뒤,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천년 왕국 신라의 쇠망을 가슴 아파한 태자로서 조국을 잃은 설운 마음을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더불어 하늘 아래 고개 들고 살 수 없다는 마음이 깊었을 겁니다. 덧없는 나그네 신세의 왕자는 삼베 옷(麻衣)을 입고 금강산 깊은 산 속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습니다. 멀고 험한 길을 수굿이 걷고 또 걸었지요. 지친 몸을 이끌고 걷던 중에 산 좋고 물 좋은 양평 땅의 용문산에 이르게 됐습니다. 지친 몸을 누이기 위해 왕자가 머무른 곳은 용문사였습니다. 왕자는 쇠망한 조국 신라를 생각하며 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천년 왕국의 대를 되살려 이어가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었겠지요. 무려 1천 백년 쯤 전의 일입니다.

○ 정삼품에 해당하는 당상직첩의 벼슬을 내리기도 ○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심었다고 하는 전설도 함께 전해옵니다. 7세기 초에 태어나 서기 702년에 이 세상을 떠난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용문사에 들렀을 때 꽂아둔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의상대사의 지팡이 전설을 따르면 나무의 나이는 무려 1천 3백 살이나 됩니다. 정확한 자료가 남지 않아 어느 쪽도 확실한 건 아닙니다. 어느 전설을 받아들이든 나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놀라울 만큼 신비로운 생명력을 자랑하는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앞에서 말씀 올린 것처럼 나이만큼이나 거대한 규모를 가진 나무로도 유명합니다. 이같은 여러 가치가 인정되어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해 보호하는 나무가 됐습니다.

  나무는 참 장하게 자랐습니다. 나무가 살아온 신라 패망으로부터 1천1백 년이라는 긴 세월은 1백 년을 채 살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헤아리기 힘든 세월입니다. 처음에 조국을 잃은 슬픔을 담고 싹을 틔운 나무였지만, 이제는 나무의 어느 곳에서도 그런 슬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천년 왕국 마지막 왕자의 자존심을 지키듯 융융하기만 합니다. 조선 시대 때에는 세종 임금이 이 나무에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나무를 나라의 보물로 여긴 끝에 정삼품에 해당하는 당상직첩(堂上職牒)이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보은 속리산의 정이품송이 세조 때 벼슬을 받은 나무로 알려졌으니, 벼슬을 한 나무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나무라 해야 합니다.

○ 민족의 고난을 고스란히 겪으며 살아온 장한 나무 ○

  용문사 은행나무는 그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모든 고난을 고스란히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나라에 험한 변고가 다가올 때면, 언제나 나무는 미리미리 큰 울음 소리를 내서, 닥쳐올 변고에 대비하도록 사람들을 일깨웠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1950년 한국 전쟁 때도 어김없이 큰 울음 소리로 변고의 기미를 알렸다고 합니다. 또 고종이 승하했을 때에는 큰 가지 하나를 떨어내면서 슬펴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적지않은 위기를 거치기도 했습니다. 일제가 조선병합을 서두르던 때에 그에 항거하는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1909년에 이르러 대토벌작전을 벌였는데, 그때 용문사를 의병의 은거지가 될 만한 곳이라 해서, 모든 전각을 불에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지요. 절집도, 주변의 숲도 모두 불에 탔지만, 놀랍게도 이 은행나무만큼은 화재를 피해 살아남았습니다.

  이 거대한 크기의 은행나무는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 암나무입니다. 은행나무의 열매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 요즘 많은 도시에서 서둘러 뽑아내는 바로 그 암나무입니다. 한창 때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에서 맺는 열매를 털어 거두면 무려 서른 가마니나 됐다고 합니다. 1천1백 년이나 지난 요즘도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놀라운 생명력이지요. 그러나 예전만큼 무성히 달리지는 않습니다. 용문사 주지인 호산 스님께 ‘요즘은 열매가 얼마나 열리는지’ 여쭈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스님은 나무가 해걸이를 하기 때문에 고르지는 않아도 대략 여덟 가마니 정도를 줍는다고 하셨습니다. 일부러 털어내는 게 아니라, 저절로 떨어진 게 그 정도라고 합니다. 스님은 은행 열매를 정성껏 잘 주워 여러 개의 작은 바구니에 포장해서 나무와 자연과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분들께 선물한다고 합니다.

○ 해마다 양평군 주관으로 ‘천년 은행나무 축제’를 열어 ○

  〈용문사와 주위 마을에서는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의 신령함을 존중해서 오래 전부터 해마다 한번씩 나무 앞에 모여서 대신제를 지냈는데, 최근에는 이를 양평군의 축제로 발전시켰습니다. 해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에 양평군 주관으로 열리는 ‘천년 은행나무 축제’가 바로 이 은행나무 대신제의 연장인 셈이지요. 경기도 양평 용문산 용문사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절집보다 먼저 은행나무를 바라보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은행나무 아래에 잠시 서서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은행나무 가지 끝을 올려다보며 생명의 신비에 대한 외경심을 다져보곤 하지요. 우리 곁에 이처럼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살아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절로 가슴이 뜁니다.

  이 큰 나무에 노란 단풍 물이 더 곱게 오르기를 기다리며, 이 아침의 《나무편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 이 땅의 모든 나무, 그 위에 서 있는 은행나무를 돌아보며 9월 23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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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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