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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이백 년, 긴 세월 동안 왕의 기품을 잃지 않는 나무 날짜 2019.06.16 13:38
글쓴이 고규홍 조회 214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천이백 년, 긴 세월 동안 왕의 기품을 잃지 않는 나무

  어! 벌써 여름인가봐요. 아직 길가 울타리에 빨갛게 피어있는 장미꽃 한창인데, 그토록 찬란했던 봄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우리 곁에서 사라졌어요.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시간이 흘러갑니다. 한낮 좁다란 작업실에서는 냉방기를 켤까 말까 갈등하는 날들이 이어집니다. 불현듯 지난 봄에 찾아보았던 여러 나무들이 떠오릅니다. 아무래도 우포 늪이 가장 인상 깊은 답사였다고 떠오릴 수밖에요. 언제나 그랬듯이 늪에 기대어 살아가는 숱한 생명의 아름다운 노래는 오래 잊지 못할 겁니다. 지난 번 《나무편지》에서 채 다 하지 못한 생명 이야기는 언제고 다시 말씀 드릴 때가 있겠지요.

○ 숙부의 칼에 목숨을 잃은 한많은 왕의 자취 ○

  우포 늪을 향해 가는 길에 들렀던 합천 가야산 해인사, 그 절집에서도 의미 있는 큰 나무와 아름다운 숲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해인사 숲을 찾을 때마다 가장 먼저 찾는 나무는 제가 ‘왕의 나무’라 별명한 느티나무 고사목입니다. 천이백 년 전에 왕이 손수 심은 나무이지요. 해인사 일주문에서 천왕문을 향해 걸어 오르다가 오른편에서 저절로 만나게 되는 커다란 나무입니다. 신라 40대 왕인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이 심은 나무는 이미 오래 전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진에서 보시 듯, 둥치만 남은 고사목입니다. 죽은 나무이지만, 언제 보아도 옛 어린 왕의 한 많은 이야기를 수런수런 전해주는 듯, 애틋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고사목입니다.

  ‘한恨 많은 왕’이라고 했는데요. 애장왕이 그런 왕입니다. 그의 아버지 소성왕(昭聖王, 재위 799∼800)이 왕이 되고 얼마 뒤에 갑자기 죽자 열세 살밖에 안 된 어린 태자가 ‘애장왕’이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세상 물정은커녕 한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너무 어렸던 그는 처음부터 숙부 김언승의 섭정으로 왕의 자리를 지키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애장왕은 숙부 김언승의 칼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고, 조카를 살해한 김언승은 신라 41대 헌덕왕이 됩니다. 권력 세계에 벌어지는 비극적 참사의 한가운데에 놓이게 된 겁니다.

○ 죽어서도 신라 불교의 역사를 온전히 간직하고 남아 ○

  신라시대에는 즉위한 왕은 곧바로 혼례를 올려야 했답니다. 어린 애장왕도 그래서 혼례를 치르고 왕비를 맞이했는데, 얼마 뒤 왕비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왕비의 병을 낫게 하려고 애장왕은 법력이 높은 스님을 두루 수소문하여 가야산 토굴에서 수행 중이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스님을 찾아 뵙고, 기도를 청했습니다. 두 스님은 왕의 청을 받아 정성껏 기도를 올렸고, 그 덕으로 왕비의 병이 나았습니다. 애장왕은 두 스님에 대한 사례로 스님들을 위해 절을 지으라고 명합니다. 그 절이 바로 지금의 해인사입니다. 애장왕은 그 뒤로 해인사를 자주 찾았고, 갈 때마다 해인사 인근에 크게 잘 자라는 나무, 즉 느티나무를 여러 그루 손수 심었다고 합니다.

  애장왕이 천이백 년 전에 심은 나무는 세월의 풍진에 하나 둘 묻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단 한 그루. 그때 그 나무들 가운데 한 그루가 줄기가 부러진 채 고사목으로 남았습니다. 바로 오늘의 《나무편지》에서 사진으로 보여드리는 고사목이 그 나무입니다. 어림잡아 육 미터 쯤 되는 줄기만 남은 고사목이지만, 나무는 늠연합니다. 긴 세월 동안 왕의 기품을 이어왔고, 어느 순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줄기가 부러졌지만, 여전히 기품을 잃지 않고, 천년 전 신라의 역사, 비운에 목숨을 잃은 어린 왕의 한, 큰 절 해인사의 역사를 당당히 증거하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리지 않고 “나무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 다시 크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세상살이에 지친 선비 최치원의 지팡이가 자란 나무 ○

  해인사의 나무 이야기를 할라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신라 때에 역시 한많은 인생 살이를 접고, 해인사에서 은거한 당대 최고의 선비 최치원의 한을 담고 서 있는 전나무입니다. 해인사 경내에 들어서면 학사대라는 조붓한 언덕이 있고, 그 언덕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나무입니다. 최치원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자라난 나무라는 전설을 품은 나무로, 2012년에 천연기념물 제541호로 지정한 나무입니다.

  아, 참. 오늘 《나무편지》의 맨 위 사진은 지난 토요일에 다녀온 천리포수목원 풍경입니다. 여러 종류의 노루오줌이 만발한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한낮에 숲을 산책하면서, 그늘 밖으로만 나오면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계절, 여름입니다. 다가오는 더위에 지치지 않고 건강한 여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여름을 건강하게 맞이하기 위하여 지난 봄을 떠올리며 6월 17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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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신명기 (2019.06.20 08:57)
哀莊王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더 어울리는 이름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여름이 되면서 제 일터에서는 여름꽃이 여기저기 핍니다
보기 귀하다는 여름 철쭉도 피고
원추리 우단동자 한련화 노랑어리연--
그리고 호박꽃과 박꽃 오이꽃이 피고지고를 반복합니다~~
교수님 땀흘리는 만큼
저희는 좋은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 (2019.06.21 07:43)
그러게요. 어쩌면 그렇게 이름을 알맞춤하게 지었을까요. 애장왕! 참..... 그 일터, 참 좋으네요.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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