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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침략자의 약탈에 맞서 민중의 재산을 지킨 장한 나무 날짜 2018.11.25 10:56
글쓴이 고규홍 조회 426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침략자의 약탈에 맞서 민중의 재산을 지킨 장한 나무

  지난 《나무편지》에서 ‘어엿한 호적과 넉넉한 재산을 가진 나무’ 석송령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석송령은 워낙 널리 알려진 나무여서, 잘 아는 분들이 더 많겠습니다만, 《나무편지》를 아껴 봐 주시는 분들 가운데에도 석송령 사연을 처음 듣는 분들이 몇 분 계셨던 모양입니다. 흥미롭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아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하고, 재산을 갖게 된 과정을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고, 후계목 이야기를 전해드린 건데, 조금 더 자세히 적어드릴 걸 그랬나봅니다. 짧게 줄이느라 못 다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다음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요. 오늘은 또 하나의 ‘호적과 재산을 가진 나무’ 황목근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 석송령이 호적을 가진 지 12년 뒤에 생긴 일 ○

  황목근이 석송령처럼 호적과 재산을 갖게 된 건 석송령이 어엿이 호적을 갖고 이수목 님의 재산, 땅 2천 평을 물려받아 등기에 올린 1927년으로부터 12년 지난 1939년의 일입니다. 황목근이 서 있는 곳은 석송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사람의 길로는 32킬로미터, 새의 길로는 2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예천 용궁면 금남리 금원마을의 앞논 한가운데입니다. 황목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봄에 노란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까만 열매가 맺히는 팽나무입니다. 이 까만 열매를 새총에 넣고 쏘면 ‘팽!’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해서 팽나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나무이지요.

  금원마을에는 오래 전의 마을 기록인 ‘금원회의록’이 남아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마을에서는 백 년 쯤 전부터 성미(誠米)를 모아 마을 공동재산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풍습인 ‘성미’는 밥 지을 때, 식구들이 먹을 쌀을 쌀독에서 꺼낸 뒤에 딱 한 공기씩을 빈 독에 옮겨두는 쌀을 이야기하는데요. 식구들이 먹을 밥의 양을 조금씩 줄이면서, 언젠가 우리 마을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누군가를 도울 자산을 모으는 겁니다. 먹고 남은 쌀을 모으는 게 아니라, 허리띠를 조금씩 졸라매면서 어려운 때를 대비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비밀스레 지켜야 할 특별한 이유 ○

  마을 당산나무인 팽나무가 황목근이라는 이름으로 물려받은 재산이 바로 그 공동재산입니다. 야릇한 것은 지금 이 마을에 살아 계시는 어르신들은 나무가 재산을 물려받게 된 건 단순히 공동재산에 대한 다툼이 있을까봐였다고만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별다른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마을 어른들의 말씀을 믿을 수밖에요. 그러나 과연 그게 전부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자연스럽지 않은가요? 재산권 다툼을 막기 위해서 굳이 나무를 사람처럼 호적에 올리는 엄청난 일까지 벌여야 했을까요? 지금 이 마을의 어른들은 나무가 재산을 갖게 된 1939년 무렵에 대략 십대의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이었을 텐데, 혹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쩌면 알아서는 안 될 뭔가 절실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939년이라는 상황을 곰곰 생각해 보게 된 건 그래서였습니다. 그때는 일제 침략자들이 전쟁물자를 대기 위해 우리 민중의 재산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던 무렵입니다. 손에 붙들고 있던 놋숟가락까지 빼앗아가던 시절이었다고 하잖아요. 침략자의 악랄한 약탈이 이곳 금원마을을 빗겨갈 리 없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불안했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마을 공동재산, 달리 보면 임자 없는 재산인 마을 공동재산을 생각하면 더 불안했겠지요. 금원마을에 차곡차곡 쌓인 공동재산은 배고파 하는 내 아이를 달래가며 모은 성미로 이룬 재산이잖아요. 그걸 어떻게 허수로이 빼앗길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집안의 다른 재산을 빼앗기는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성미로 모은 공동재산을 빼앗긴다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을 겁니다. 대책을 세워야 했겠지요.

○ 노란 색 꽃을 피우는 근본이 있는 나무 ○

  온갖 방법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금원마을까지 흘러들어온 예천군의 석평마을 석송령의 별난 이야기가 떠올랐을 겁니다. 석송령이 소유한 땅 2천 평은 누가 봐도 ‘임자 없는 재산’이 아니라, 소유권이 분명한 재산이었습니다. 생각 끝에 마을 어른들은 석송령을 따라 해 보자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을에서 오랫동안 당산제를 지내며 신목(神木)으로 모시던 마을 앞논 한가운데 서 있는 아름다운 팽나무를 떠올렸습니다. 우선 나무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봄에 노란 색 꽃을 피우는 나무이니, 노란 색을 뜻하는 황(黃)씨 성을 붙여주고, 근본이 있는 나무라는 생각에서 ‘목근(木根)’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머뭇거릴 것 없이 곧바로 군청에 가서 황목근이라는 이름을 호적에 올렸고, 마을 공동재산으로 바꾼 땅 3천7백 평을 황목근에 등기 이전했습니다. 이렇게 했다고 해서 우리의 공동재산이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일제의 약탈 절차를 번거롭게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 거죠. 일제 침략자로부터 우리의 소중한 재산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이룬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은 일제 순사들은 물론이고, 일제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들통 나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이 일을 철저히 비밀스럽게 진행했습니다. 특히 마을의 천둥벌거숭이인 어린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기로 약속했던 것은 아닐까요?

○ 여전히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지키는 당산나무 ○

  황목근은 그래서 더 소중합니다. 비록 다른 곳에서의 사례를 그대로 따라 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먼저 했고, 누가 그걸 따라 했느냐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일제의 약탈로부터 우리의 재산을 지켜준 나무라는 점에서는 이 땅에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장하고 장한 나무라는 이야기입니다. 황목근 덕으로 금원마을의 공동재산은 무사히 일제 강점기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나무는 다시 예전처럼 마을의 당산목으로 마을의 공동재산을 관리하며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꿋꿋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최근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정확히는 1998년 봄이었다고 합니다. 황목근에서 떨어진 씨앗이 근처에서 저절로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황목근의 자식 나무라 해서 황목근 곁에 따로 화단을 만들어 잘 보호했습니다. 어린 나무는 무럭무럭 잘 자라서 이제는 꽤 큰 나무가 됐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 아들 나무에게도 이름을 붙여주기로 하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들 나무의 이름을 공모했습니다. 여러 이름 가운데에 최종적으로 아들 나무의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만수(萬壽), 오래오래 잘 살라고, 붙인 이름입니다. 황만수, 황목근의 아들 나무는 그래서 황만수라는 이름으로 황목근 곁에서 늠름하게 서 있게 됐습니다.

○ 스무 살 된 황목근의 아들 나무 ‘황만수’ ○

  스무 살의 나무라면, 사람과 달리 아직은 어린 나무이죠. 그렇다고 사람처럼 꼭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나무는 하늘과 바람과 별을 따라 스스로 자라는 생명입니다. 지난 번 《나무편지》에서 소개해드렸던 석송령의 후계목처럼 황만수 역시 당장에 황목근의 명성과 재산을 물려받을 채비를 재우쳐야 할 까닭은 전혀 없습니다. 여전히 황목근은 건강하고 늠름하게 서 있으니까요. 황만수는 제 어미나무인 황목근 곁에서 어미나무와 그를 찾아와 경배하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처럼 천년 만년 장수를 누리며 이 땅에 살아갈 고마운 나무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사람의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사람들이 지나온 소중한 세월을 차곡차곡 자신의 몸 안에 쟁여 넣습니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그의 줄기 안쪽 깊은 곳에 쌓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곁에서 스스로 장하게 싹을 틔운 아들 나무까지 아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천천히 배워나가겠지요. 이 땅에서 나무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 일인지, 예천 용궁면 금남리 금원마을 너른 벌판에 서면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황목근 황만수를 떠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흐뭇이 미소 짓게 됩니다.

  첫눈이 환하게 내렸습니다. 그러고보니, 다음에 띄울 나무편지는 올 한 해의 마지막 달인 십이월에 띄우게 되겠네요. 한 해를 마무리할 때이군요. 이 계절, 모두 건강하게 지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사람과 더불어 살며 사람살이를 지키는 나무를 생각하며 11월 26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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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신명기 (2018.12.03 10:37)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읽었습니다.
누가 오늘 비는 겨울에 오는데도 봄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날이 푹해서 그런 느낌이 들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날씨 따라 가기도 하니까요.
황목근 이야기 읽다 보니 마음이 황목근을 따라갑니다.
사회 환원이라는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날 추워지는 겨울 사회 어느 곳에 제 미약한 온기 하나 환원해야 할지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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