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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빛 설국에서 여전히 기품을 잃지 않고 선 구상나무 날짜 2018.01.20 16:31
글쓴이 고규홍 조회 557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은빛 설국에서 여전히 기품을 잃지 않고 선 구상나무

  제주 답사 여행은 무엇보다 한라산 산행을 위해서였습니다. 한라산 해발 천 미터 고지 위쪽에서 자라는 구상나무의 안부를 살피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길 떠나기 전에 항공표를 예매하고, 날짜를 기다리던 중에 난데없이 제주 지역의 폭설 소식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제주 공항이 마비될 정도의 폭설이었지요. 더불어 육십센티미터 정도의 눈이 내린 한라산에는 아예 입산이 금지됐다는 소식까지 날아왔습니다. 한라산, 그것도 구상나무를 만나려던 답사인데, 기껏 제주까지 가서 정작 구상나무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돌아올 수도 있겠지 싶었지요. 그런데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던 일요일 아침에는 맑고 포근한 날씨로 기후가 싹 바뀌었습니다. 한라산도 진달래밭대피소까지는 입산이 가능해졌다는 소식까지.

○ 육십센티미터 쯤 내린 한라산 폭설 ○

  하지만 진달래밭대피소까지 가는 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일렀습니다. 구상나무 군락지는 진달래밭대피소를 지나 오르면서부터 더 넉넉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에도 진달래밭대피소에서 더 이상의 산행이 금지되는 바람에 겨우 진달래밭대피소 가까이에서 자라는 구상나무만 일별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지요. 만일 진달래밭대피소까지만 갈 수밖에 없다면 한라산행은 접어두고 제주의 다른 나무들만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래도 구상나무에 대한 그리움은 접어지지 않았습니다. 우선 첫째 날은 지난 《나무편지》에 보여드렸던 〈제주 산천단 곰솔군〉을 비롯해, 〈제주 수산리 곰솔〉과 〈제주 성읍마을 느티나무와 팽나무군〉 그리고 짬이 된다면, 몇몇 동백나무 군락지를 찾아보기로 계획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제주 산천단 곰솔군〉을 잘 보고 돌아나오는 길에 자동차가 눈밭에 빠져서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택시 기사님들을 비롯해 몇몇 친절한 지역 분들의 도움이 있기도 했지만, 자동차는 도저히 눈밭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구난차를 호출해 겨우 빠져나왔지요. 눈밭 십 여 미터 지나오는 데에 한 시간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저물 녘까지 계획했던 제주의 여러 나무들을 찾아보고 숙소에 들었는데, 한밤에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들이 유난히 총총했습니다. 이대로라면 한라산 정상, 백록담까지 오를 수 있으리라는 들뜬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한라산 초입 성판악. 쌓인 눈은 그대로였지만, 백록담까지의 산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산을 올랐습니다.

○ 멀리서 바라본 구상나무 군락은 여전히 장해 ○

  지금 이 《나무편지》에 띄우는 사진들이 바로 그 산행 길에서 만난 구상나무의 풍경입니다. 온통 은빛으로 물든 설국 위로 새파랗게 빛나는 하늘은 더 없이 찬란했습니다. 성판악에서 시작한 비교적 평탄한 새하얀 눈밭 길을 재우쳐 걸었습니다. 서둘러 구상나무를 만나야 하니까요. 속밭대피소를 거쳐 진달래밭대피소까지 돌아보는 곳 어디라도 은빛의 한라산은 장관이었습니다. 보기 드문 절경을 감상하는 많은 등산객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더뎠습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절경이었지요. 하지만 아직은 서둘러야 했습니다. 포근한 날씨 탓에 온몸이 땀 범벅이 되며 진달래밭대피소 가까이 오르자 구상나무의 싱그러운 자태가 하나씩 둘씩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온 가지에 흰 눈을 한가득 이고 있는 때문에 구상나무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는 건 불가능하지만, 생각보다는 구상나무 군락지의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 뿐인 걸요. 좀더 올라가면 ‘멸종’을 운운할 정도로 심각하게 망가져 가는 구상나무 군락지의 참혹한 상황을 볼 수 있으리라는 짐작에 아직은 안도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잠시 진달래밭대피소에서 숨을 돌리며 다리쉼을 했습니다. 진달래밭대피소에서는 멀리 백록담이 훤히 바라다보입니다. 물론 백록담 아래 산기슭에 촘촘히 자리하고 서 있는 구상나무 군락도 함께이지요. 눈에 덮여 온통 은빛이지만, 멀리서 바라본 구상나무 군락은 여전히 장해 보였습니다.

○ 죽어 고사목이 돼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나무 ○

  행장을 거두어 백록담을 향해 올랐습니다. 진달래밭대피소부터 백록담까지의 길은 가파른 편이어서, 숨결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늦춰서도 안 되는 걸음이어야 합니다. 제 체력으로는 매우 무거운 편이랄 수 있는 카메라를 등짐에서 꺼내 손에 들었습니다. 바람막이용 곁옷의 한쪽 바깥 주머니에 작은 카메라를 넣고 다니기는 했지만, 구상나무의 상태만큼은 더 섬세하게 기록하려 했습니다. 거추장스러울 뿐 아니라, 걷기에도 적잖이 부담을 주는 묵지근한 카메라를 어깨에서 목으로 옮겨 걸었다가, 때로는 손에 들면서 걸었습니다. 구상나무의 상태를 사진으로 기록할 요량이었지요.

  융융하지만, 다소곳한 원뿔형으로 음전하게 서 있는 구상나무는 언제나 그랬듯이 바라볼 수만 있어도 더없이 좋은 나무입니다. 게다가 온 몸에 하얀 눈을 뒤집어 쓴 구상나무는 그야말로 천년의 기품을 간직한 우리 땅 최고의 아름다운 나무라 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겹겹이 쌓인 눈 때문에 나무의 생육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하릴없이 그의 수형이 뿜어내는 천년의 기품을 감상하는 수밖에요.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모든 등산객들은 은빛 구상나무가 드러내는 천하의 절경에 잇단 탄성과 찬사를 흘렸습니다.

○ 다음 《나무편지》에서 한번 더 구상나무 이야기를…… ○

  천이백미터 고지를 넘어서면서부터 구상나무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하나 둘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예 마지막 한 잎까지 오래 전에 덜어내고, 오직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하얀 눈을 뒤집어 쓴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한두 그루가 아니라, 아예 고사목들이 군락을 이룬 곳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빛 설국에서는 고사목조차도 환상적인 풍경을 이뤄냈습니다. 신비로울 만큼 아름다운 절경은 구상나무의 안위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정말 훌륭했습니다. 애시당초 구상나무의 안부를 걱정하며 찾은 게 아니라면 그냥 그 풍경 감상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눈만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죽어 하얗게 마른 구상나무 고사목을 보고 혀라도 한번 쯤 끌끌 차고 지나갔으련만 그러기에는 설국의 풍경이 더없이 훌륭했습니다.

  우리의 구상나무 이야기를 하려 시작한 오늘의 《나무편지》가 한라산 설경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벌써 마무리할 때가 됐네요. 구상나무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더 많이 남았습니다. 할 수 없이 다음 《나무편지》에서 우리의 구상나무에 대해 몇 가지 잘못 알려진 사실과 현재의 실태 등에 대해 한번 더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나무편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죽어 고사목이 되었을지언정 여전히 기품을 잃지 않고 훌륭한 자태를 간직한 한라산 구상나무 군락지의 풍경을 보여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하겠습니다.

  구상나무 이야기로 이어갈 다음 《나무편지》를 기다려 주시기 바라며, 오늘은 긴 붓방아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 제주 한라산 구상나무 숲의 은빛 절경을 추억하며 1월 22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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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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