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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우쳐 한가위 명절 맞이에 나선 도시 나무의 가을 풍경 날짜 2015.09.23 11:21
글쓴이 고규홍 조회 4198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 생각] 재우쳐 한가위 명절 맞이에 나선 도시 나무의 가을 풍경

??온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늦은 밤까지 일자리를 떠나지 못한 일은 종종 있지만, 밤을 꼬박 새운 건 꽤 오랜만입니다. 새벽 되어 꿈 속을 걷는 듯한 몽롱한 느낌으로 번잡한 길을 걸었습니다. 며칠 째 되풀이되는 글 작업입니다. 옷깃을 스미는 바람이 차갑습니다. 길을 나서자 이팝나무 가로수가 지친 몸을 위로하듯 반겨 맞이합니다. 나뭇가지 사이에 조롱조롱 맺힌 열매가 까맣게 꿈결처럼 다가옵니다. 까맣다고 했지만 가을 하늘 푸른 빛을 품었기에 푸르스름한 까만 빛으로 영롱합니다. ‘뻣’이라고도 부르는 이팝나무 열매입니다. ‘뻣’은 벚나무의 열매인 ‘버찌’의 지방말인데, 이팝나무의 열매가 그 버찌와 비슷하다 해서 그리 불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팝나무를 ‘뻣나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뻣’이 검푸르게 익어가는 가을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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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건너려고 빨간 신호등 앞의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햇살이 눈 부셔 그늘로 들어섰습니다. 나무가 지어주는 그늘이지요. 언제나 아침 햇살 눈부시게 맞이하며 신호등 앞에 지어주는 회화나무 그늘입니다. 가을이어서 지난 여름 꽃 필 때와 다른 느낌으로 나뭇가지를 톺아봅니다. 그렇지요. 콩꼬투리 모양의 회화나무 열매가 달렸습니다. 삐뚤빼뚤 불규칙한 모습을 바라보자니 절로 미소가 배어납니다. 학자, 선비를 상징하며 늘 점잔을 빼는 나무여서 더 그렇습니다. 선비의 근엄한 이미지를 갖춘 나무가 맺은 점잔치 못한 열매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수밖에요. 올에는 지난 해에 비해 꽃이 적었던 때문인지 열매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해거리를 하는 모양입니다.

??가죽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운 길가 담장 안쪽에서는 모감주나무가 열매를 익혀갑니다. 그늘 깊은 탓에 모감주나무 열매는 빛깔이나 모양이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습니다. 잎도 햇살 좋아야 광합성을 잘 하겠지만, 열매도 햇살 적으면 힘을 잃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새벽 녘에 겨우 마감한 어느 칼럼의 첫 문장은 “나무는 빛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다”라고 썼습니다. 하기야 나무 뿐이겠습니까, 빛 없이 암흑에서 대관절 어느 생명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가을 지나 낙엽 지고 나면 갑자기 환하게 빛을 받는 큰 나무 그늘 아래의 작은 풀꽃들이 갑자기 생기를 찾는 것도 그런 이치입니다. 빛 모자라 채 여물기 전에 쭈그러든 모감주나무 열매의 속 사정이 궁금합니다. 모자란 빛이건만 모감주나무는 뒤늦게라도 야무지게 가을 갈무리를 하고야 말겠지요.

??산수유는 절묘하게 다른 나무의 그늘을 피해 나뭇가지를 뻗었습니다. 한가득 햇살 받아 모으려 뻗어낸 가지 위의 산수유 열매는 튼실합니다. 아직 연초록 빛깔로 겨우 모양만 갖추었을 뿐입니다. 저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서둘러야 합니다.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나무에게도 가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어떤 시인의 시구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하얀 눈 내리기 전에 새빨간 옷으로 매무시해야 합니다. 가을 잎 지고, 하얀 눈 내릴 때에 산수유 빨간 열매는 이 거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가을을 에멜무지로 보냈다가는 겨울 주인공의 자리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봄 되어 다시 샛노란 꽃 피울 때까지 산수유는 이 땅의 하얀 겨울을 색깔의 잔치를 벌여야 합니다.

??큰 길에서는 개잎갈나무가 지친 사람의 눈길을 이끕니다. 발맘발맘 짚어보니 아파트 8층 정도 높이까지 키를 키운 큰 나무입니다. 곁에는 그보다 더 높이 솟구친 메타세쿼이아가 몇 그루 줄지어 서 있지만, 풍성함으로 치면 메타세쿼이아가 따를 수 없습니다. 좁다랗게 솟아오른 메타세쿼이아와 달리 널찍하게 펼친 나뭇가지와 풍성한 잎으로 드리운 그늘은 이 나무가 왜 ‘히말라야시다’로 불리며 세계 3대 조경수로 꼽혀야 하는지를 금세 알게 합니다. 이 듬직한 나무에도 열매가 함함하게 돋아났습니다. 좀 지나면 여느 침엽수의 열매에 비해 견고한 모양으로 키워갈 열매이건만 처음 돋은 열매는 여리디 여립니다. 도심의 환경이 좋지 않아서일까요? 참 많은 열매를 한꺼번에 올렸습니다. 촘촘히 돋아난 앙증맞은 열매들이 내년 이맘 때까지 과연 얼마나 많이 살아남을지 걱정하게 됩니다.

??꿈꾸듯 졸린 눈 비비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이팝나무 앞에 섰습니다. 지난 봄 하얀 꽃을 소담하게 피웠던 나뭇가지에 꽃송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맺힌 검푸른 열매를 바라봅니다. 낮 되면 다시 뜨거워지는 날씨이건만 이 어지러운 도시 한가운데에도 가을이 찾아왔다는 걸 새삼 확인합니다.

??다시 밀린 일 붙안고, ‘글감옥’이라고도 부르는 작업실에 올라가야 합니다. 한가위 명절 오기 전에 생산해야 할 글 빚이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한가위 명절을 더 즐겁게 맞이하기 위해 남은 며칠이라도 늦은 밤까지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겠네요. 그래도 더 좋은 갈무리의 계절을 위해 좀더 애쓰겠습니다. 명절 지내고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 더 즐거운 한가위 명절을 기다리며 9월 23일 한낮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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