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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생각w
제목 처음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날짜 2020.04.18 14:19
글쓴이 고규홍 조회 361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 생각] 처음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나무가 있었다

  이른 아침, 늘 하듯이 시 한 수 베껴 쓰다가, 눈에 들어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매천 황현이 전남의 백암산에 들어 하루 묵으며 쓴 〈숙백전(宿柏田)〉이라는 칠언율시의 다섯 여섯 번째 행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아래에 그대로 옮깁니다.

  石梘水鳴紅稻臥
  薺花風擺白糜奔

  번역하자면, “물 졸졸 흐르는 돌 홈통 곁에 붉은 벼 누웠고/바람에 흔들리는 냉이꽃은 흩어진 흰 죽이라” 쯤 될 겁니다. 바람결에 흩어지는 자디잔 냉이 꽃 무리를 흩뿌려진 흰 죽으로 본 겁니다. 마치 흐드러지게 피어난 메밀꽃을 ‘소금을 뿌린 듯’하다고 했던 이효석을 떠올리게 하는 야릇하면서도 절묘한 표현입니다.

  한시 베껴쓰기 공책을 좀더 살펴보니, 아예 ‘냉이꽃’을 제목으로 한 시도 있습니다. 성현의 칠언율시입니다.

  薺花 / 냉이꽃
  - 成俔 / 성현

  叢生盤地托芳根 / 향긋한 뿌리에서 모여 돋아나서
  甘軟調羹自媚飧 / 달고 연한 국물 맛이 일품이어라
  陌上雪殘靑葉長 / 밭두렁 위 잔설 곁에 푸른 잎 솟아
  墻陰春老素花繁 / 늦봄의 울 곁에서 소박한 꽃 피운다
  五溪野外人誰採 / 개울가 들 밖에서 누군가 캐내서는
  萬落城中賣作斤 / 사람 많은 성 안에서 무게 달아 판다
  舊穀旣空新麥短 / 묵은 곡식 떨어지고 햇 보리도 모자란데
  饞農辛苦度朝昏 / 굶주린 농부는 냉이국으로 아침 저녁 넘긴다

  다섯 번째 줄에 나오는 ‘五溪’는 중국의 시인 육유(陸游)의 시구를 인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개울가’로 해도 되지 싶어서 그렇게 옮겼습니다.

  성현이나 황현의 시를 보면, 옛 사람들이 그저 식물을 먹을거리로만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성현은 분명히 보릿고개를 넘겨야 하는 시기에 냉이만큼 먹거리에 요긴한 게 없다는 걸 시 속에 표현했습니다. 당장에 절실한 일이었겠지요.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아직 밭두렁에 눈이 남아있을 만큼 차가운 날씨의 이른 봄에 서서히 잎을 틔우고 돋아나서 봄 깊어지면서 하얗게 피어난 냉이 꽃의 생명력을 먼저 노래했습니다. 황현도 그랬지요. 무성하게 피어있는 하얀 꽃을 흩뿌려진 흰 죽에 비유하며,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습니다.

  도시의 길섶에도 냉이 꽃이 한창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황현이나 성현처럼 그 꽃을 세심하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편치 않은 까닭으로 발걸음이 붙잡혀 있는 이 즈음에 도심의 길섶에서 오가는 도시인들을 맞이해주는 냉이 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예전처럼 냉이 꽃을 노래하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 테고, 냉이 꽃 노래를 즐겨 불러줄 사람도 없겠지만 언제나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길가의 작은 꽃 한송이를 더 소중하게 바라보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모든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그 안에 놓인 나무와 풀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학교는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차츰 익숙해져 가는 온라인 강의는 좀더 이어지겠지요. 다시 또 얼마 쯤이 되더라도 우리 모두의 삶이 더 건강하고 평온해질 수 있을 때까지 잠시 서로에 대한 그리움은 가슴 속에 쌓아두기만 해야 하는 냉이 꽃의 계절입니다.

  조금 더 있으면 다시 길 위에 올라야 하겠지요. 더 즐겁고 보람찬 발걸음 될 수 있도록 오늘 오후에는 자동차에 쌓인 뽀얀 먼지를 깨끗이 씻어내고, 텅빈 연료 통도 한가득 채우겠습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나무를 떠올리며 인사 올립니다.

  모두 평안하십시오.

  한 말씀 덧붙입니다. 이메일 주소로 드리는 《나무편지》에 오늘처럼 한자를 포함할 경우에는 컨버트하는 과정에서 일부의 한자가 몇몇 브라우저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제 홈페이지 http://solsup.com 에 들어와 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 있는 나무를 그리우 하며 4월 20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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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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