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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루한 옛 골목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나무 한 그루 날짜 2018.03.17 17:48
글쓴이 고규홍 조회 350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생각] 어린 시절 남루한 골목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나무 한 그루

  길을 걷다가 나무를 만났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자취도 남기지 않은채 훌쩍 떠나버린 아주 어린 시절, 막다른 골목 어귀에서 만났을 듯한 그런 큰 나무 한 그루를 만났습니다. 돌아보면 어릴 때 내가 살던 그 달동네 골목 어귀에 나무가 서 있었는지, 전봇대가 서 있었는지는 제대로 기억할 수 없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 시절 그 골목에 이처럼 큰 나무가 서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걷다가 우연히 만난 한 그루의 나무를 난데없이 ‘내 어린 시절 골목에 있던 그 나무’라고 생각하게 된 게 대관절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습니다.

○ 홀로 서성거리던 그때 그 골목의 남루한 풍경들 ○

  웬일이었을까. 가만히 나무 곁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서글퍼지는 세월의 속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알 수 없는 막노동판에 나가고, 어머니는 작은 키보다 더 큰 보따리를 이고 행상에 나가야 했던 남루했던 시절입니다. 하나 뿐인 누이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학교에 가고 나면 도리 없이 홀로 남아 골목을 서성거리던 그때, 곁에 나무가 있었는지 개천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아스라한 기억 가운데에 그래도 떠오르는 나무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지나는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그저 그렇고 그런 가로수들이었습니다. 아마 플라타너스라 부르는 양버즘나무였을 겁니다.

  강원도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를 다녀오던 날이었어요. 두 곳의 금강소나무 숲에서 긴 시간을 보낸 뒤여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즈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빛이 남아있는 동안 들러보고 싶은 곳이 생각났습니다. 아름다운 나무가 있을 뿐 아니라, 너른 동해 바다 풍경까지 함께 볼 수 있는 곳, 바로 삼척 죽서루였습니다. 그래서 죽서루 쪽으로 길머리를 잡고, 해 지기 전에 이르기 위해 냅다 달려갔습니다. 그 죽서루 앞 큰 도로 가장자리에서 우뚝 선 한 그루의 나무를 만났습니다.

○ 부천무릉도원수목원 〈수목원에서 만나는 인문학〉 강좌 ○

  여기서 잠깐! 부천무릉도원수목원의 프로그램을 소개합니다. 〈수목원에서 만나는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사월의 사주 동안 여는 강좌입니다. 한창 봄꽃 피어날 때이기도 하고, 온갖 나무들에 초록 잎들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아름다운 계절에, 실내가 아니라, 수목원의 숲 속 야외 무대에서 여는 네 차례의 강좌입니다. 참가비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효과적인 준비를 위해 참가 신청을 미리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 신청 접수 중이니, 여유 되시는 분들의 참여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강좌는 특히 그 동안 거의 모든 강좌를 실내에서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하던 강좌와 달리 실제 숲에서 숲의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진행하는 강좌이니, 몸과 마음을 봄볕에 맡긴다는 마음으로 참여하시면 좋을 겁니다.

  부천무릉도원수목원 참가 신청 페이지

  다시 골목의 나무 이야기입니다. 육백년 된 회화나무입니다. 죽서루 바로 앞의 성내동에 서 있는 나무이니,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삼척 성내동 회화나무〉라고 하면 되겠지요. 도로 곁의 높은 돌담 위에 우뚝 서 있어서 멀리서도 단박에 눈에 띄는 나무입니다. 죽서루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주변의 시선을 훼방하는 게 없어서 눈에는 잘 띄지만 사실 생육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몸 곳곳에 세월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으며, 줄기 윗 부분의 오래 된 나뭇가지들은 모두 잘려나갔습니다. 오래된 가지가 잘려나간 자리에는 새 가지가 가늣하게 솟아올랐는데, 보기에 참 앙상하고 처연합니다.

○ 누구라도 마음 깊은 곳에 담긴 한 그루의 나무를 …… ○

  아무리 살펴보아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나무입니다. 다만 조붓한 골목 모퉁이를 지키고 서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최소한 내게는 남다르게 다가왔어요. 나무 곁에 주저앉아서 나무를 바라보는데, 자꾸만 어린 시절에 늘 홀로 서성이던 골목길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그 골목에 어떤 나무가 있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때 그 남루한 달동네의 비좁은 골목이 눈에 선했습니다. 나무를 바라보았지만, 나무보다는 옛날 그 풍경이 떠올랐어요. 오래 전 사람살이의 무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나무를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 곁에 일어설 줄 모르고 저녁 바람 맞으며 짧은 시간이나마 옛 일을 추억할 수 있었습니다. 나무가 있어서 참 좋았던 저녁이었습니다.

○ 누구라도 마음 깊은 곳에 담긴 한 그루의 나무를 …… ○

  우리 모두 누구에게나 마음 깊은 곳에 담아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가만가만 끄집어내 그 안에 담긴 사람살이의 향기를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날들이 더 많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 한 그루의 큰 나무 앞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3월 19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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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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