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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살이의 속내 담은 '나무살이' - 국민일보 2003. 4 날짜 2004.06.19 14:46
글쓴이 고규홍 조회 2928
국민일보 2003-04-03

[책과 길] ‘이 땅의 큰나무’…세상살이 속내 담은 ‘나무살이’


예금 통장에 땅까지 가진 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 400호인 경북 예천군 금원마을 팽나무가 주인공이다. 팽나무가 가진 땅은 3700평,은행 잔고는 150만원에 이른다. 토지대장에는 아예 황목근신(黃木根神)이란 이름으로 등재돼 매년 1만원씩 세금도 낸다. 너무 오래 속세에서 부대껴 아예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 금원마을 팽나무는 이 땅 큰 나무의 세상살이를 잘 드러낸다.

키 크고 우람한 나무는 인간에게 나무 이상이다. 거목의 나이테에는 인간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있다. 옛 사람들은 마을 어귀 큰 나무에게 대소사를 상담하고 길흉화복을 물었다. 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카운셀러였던 것이다.

천리포수목원 학술팀장을 맡고 있는 고규홍씨(한림대 겸임교수)와 사진작가 김성철씨가 이 땅의 큰 나무 130그루를 찾아 떠난 길은 그래서 나무와 더불어 살았던 옛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기도 하다. 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푸른 물이 우러난다는 물푸레나무의 특징이나 암·수나무가 구별된 은행나무의 생태,음나무 가시에 얽힌 비밀 등 식물학적 상식이 곁들여지긴 했지만 나무 식생에 관한 정보는 이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저자는 이 땅의 큰 나무를 통해 우리들의 삶 깊이 감춰진 속살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 땅의 큰 나무’는 나무와 사람이 만나는 지점에서 역사와 삶,생명의 이야기를 함께 전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인 것이다. 강원도 삼척 근덕면 음나무에서는 산골로 피신했다가 결국 살해된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의 비극적 최후를,백송에서는 중국과 조선의 문화 교류를 읽는다. 호두나무 이야기는 호두를 들여온 고려 간신 유청신과 천안 명물 호두과자,알렉산더 대왕,조선조 문인 백담 구봉령을 거쳐 한나라 장건에까지 뻗어간다.

역사와 백과사전적 지식을 두서없이 오가는 이런 ‘퓨전적’ 글쓰기가 억지스럽지 않은 이유는 큰 나무의 존재 자체가 지닌 특수성 때문인 듯 하다. 큰 나무가 살아남은 데는 심은 이와 가꾼 이가 남긴 사연이 있게 마련이어서 그 이야기를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한권의 나무 문화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195컷의 사진은 책의 또다른 매력이다. 나무의 맨 몸매를 제대로 잡기 위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전국을 누빈 두 작가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다. 잎이 무성한 7월과 흰눈을 머리에 인 1월의 자태를 담은 정선 봉양리 뽕나무 사진이나 새 잎 돋은 4월과 스산한 11월 모습을 정반대 앵글에서 잡은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사진 등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다. 비록 작은 크기로 실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막 모내기를 마친 논과 가을걷이를 앞둔 논,눈이 소복히 쌓인 논 등을 배경으로 예천 금원마을 팽나무의 사계를 잡아낸 사진에서는 작가의 끈기와 집념이 묻어난다.

안타까운 사연도 많았던 모양이다. 천연기념물 297호였던 경북 청송군 부곡동 왕버들은 콘크리트 보도를 만들면서 뿌리의 절반은 콘크리트에 덮이고 나머지 절반은 개울에 노출돼 지난 태풍에 뿌리가 뽑혔다. 경기 화성 팔탄면 물푸레나무는 한켠에 들어선 컨테이너 하우스가 바람길을 막아 맥없이 부러졌다. 전주 삼천동 곰솔은 나무 밑동에 8개의 구멍이 뚫린 채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다. 구멍에서는 제초제를 투입한 흔적이 발견됐다. 3∼5층짜리 연립주택 사이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자동차가 달리는 좁은 마을길 옆에 더부살이하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회화나무 역시 안타까운 처지. 저자는 이런 큰 나무들의 삶 속에서 ‘사람의 보호 속에 살아남았으되 사람과 너무 가까워 고통받는’ 나무의 딜레마를 읽는다.

130그루의 나무를 건지기 위해 저자들은 경기 화성에서 삼척과 강진,영주,울진,남해까지 전국을 뒤져 30여종 250그루의 나무를 취재했다. 배낭을 싸고 풀기만 30여번. 그래도 ‘나무와 함께 할 수 있는 삶,사람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느라 행복한 여행길이었다고 한다(글 고규홍·사진 김성철·눌와).

이영미기자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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