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ro > 고규홍은?
고규홍은?
제목 내가 나무를 찾아 떠난 까닭 날짜 2008.02.18 10:24
글쓴이 고규홍 조회 3731
지금 활짝 피어난 목련 꽃 사이로 비춰오는 가을 오후의 햇살을 바라보며 몇해 전 눈 내리던 어느 겨울 아침을 생각합니다. 지난 7월 쯤 처음으로 이곳 천리포수목원에서 개화를 시작한 이 철모르는 목련은 '리틀 젬'이라는 미국산 목련입니다. 흔히 보는 목련이 이파리도 제대로 나지 않은 이른 봄에 쓸쓸하게 피어나 이파리가 나기를 기다리다가 처연하게 낙화하는 것에 비하면 몹시 생경한 모습입니다.

목련 '리틀 젬'이 올 가을에도 어김없이 뽀오얀 색의 꽃을 다소곳이 피우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부터 한두 송이씩 피어나더니 이 가을에는 꽤 여러 송이가 달렸습니다. 목련을 좋아하면서도 꽃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짧아 불만이었던 미국인들이 품종을 개량해 오래도록 꽃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리틀 젬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리틀 젬 앞에 선 내게 떠오른 시간은 지난 99년 가을입니다. 별 대책 없이 12년 동안의 일간지 기자 생활을 뒤로 하고 무작정 서울을 떠난 때였지요. 날마다 새로운 기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결코 새롭지 않은 일상에 깊숙이 뿌리내린 일탈의 갈망으로 서울에서 떨어진 이곳 천리포수목원으로 홀로 숨어들었습니다. 철저하게 무위도식하려는 마음으로 소지품도 얼마 챙기지 않은 채 숨어든 천리포수목원에서 나는 한달 반을 보냈어요.

산새들이 우짖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고 깨어나, 수목원 숲길을 산책하다가 배가 고파오면 집으로 들어와 먹거리를 챙겨먹고는 다시 또 수목원 숲길 한적한 곳에서 아직 채 떨구지 않은 나뭇잎을 헤아리며 지내던 한없이 께느른하면서도 달콤한 생활이었습니다. 해 저물녘이면 수목원 앞 해변에 나가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해 떨어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마흔 네번씩이나 의자를 옮겨앉으며 슬픔을 곱씹었던 어린 왕자'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달콤한 시간의 흐름 속에 천리포에도 겨울이 왔습니다. 펄펄 날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수목원 숲길을 산책하던 중에 내 눈 앞에 하얀 꽃으로 떡 하니 우뚝 선 나무 한 그루. 목련이었습니다. 눈이 펄펄 날리는 겨울 수목원 숲길에서 만난 그 꽃은 틀림없는 목련,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바로 이 '리틀 젬'입니다.

한 겨울의 목련 앞에서 나는 시간이 한 순간 멈춰버렸든가 아니면 나무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뒤범벅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나무 위 한 송이의 꽃 앞에서 내가 속해있는 세상의 모든 시간, 그리고 늘 마감 시간에 쫓기듯 몸이나 마음이 모두 숨차게 달리기만 했던 시간들이 완전히 멈춰버린 것같았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봄을 알리는 목련 꽃이 겨울 한 가운데에서 불끈 솟아났다는 것은 그때까지 아침에서 점심, 저녁으로, 봄에서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시간 개념밖에 알지 못했던 내게 완벽한 놀라움이었습니다. 그 동안 내가 알았던 시간의 질서라는 게 무참하게 깨져나가는 듯했습니다. 언제나 한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서서 영원을 향한 꿈을 키우는 식물의 시간 앞에 사람의 시간은 하릴없이 미동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한 순간의 깨우침은 내가 지금 나무와 함께 하는 삶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게 된 첫걸음이었습니다. 한달 반을 수목원에서 홀로 지낸 뒤 도시로 다시 돌아와서는 리틀 젬의 안부가 궁금해 안절부절못하고 부리나케 천리포로 향하곤 했어요. 지금도 이곳 천리포수목원에 올 때면 어김없이 나는 리틀 젬 앞에서 적지않은 시간을 보냅니다. 리틀 젬은 그렇게 내 삶의 가장 가까운 벗이 되었지요.

그 겨울부터 나는 나무와 사람이 함께 가는 길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식물학을 공부한 적은 없었지만 나는 나무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 향긋한 꽃 내음에 감춰진 나무들의 살림살이와 나뭇가지 위로 뭉툭하니 솟은 옹이 속에 배어든 사람살이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나무는 수목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붉게 물드는 단풍은 아이들 노는 소리 가득찬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도 있었고,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산과 들, 심지어는 도심 한복판을 가리지 않고 나무를 찾아다녔지요. 사람살이의 자취가 담겨있을 나무를 찾아 온 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거리의 큰 나무들은 내게 더 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철 어느 때에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무와 풀꽃들이 피어나는 천리포수목원은 언제나 내 나무찾기 작업의 포스트였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은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 어느 때에도 자기만의 색깔을 뽐내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9천7백여종의 식물들은 서로 고향을 묻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식물들이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어진 만큼씩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1962년 처음 부지가 마련되고, 73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목원으로 조성되던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렇게 나무들은 말없이 이곳의 사계절을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4백30종, 1천8백그루의 목련 꽃이 일제히 봄의 아우성으로 피어나는 봄의 수목원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만, 천리포수목원의 아름다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무더위를 식혀줄 듯 산들산들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출렁이는 층층나무가 아름다운 여름이 있는가 하면, 고운 단풍 뽐내는 화살나무 잎의 붉은 빛이 아름다운 가을이 있습니다. 겨울을 따뜻하게 나기 위해 털옷을 입은 채 함박눈 맞고 서 있는 목련 꽃봉오리가 아름다운 겨울은 또 어떻습니까. 그렇게 이곳에서 식물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빛깔과 이름을 가진 만큼 교만과 허세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어울림을 온몸으로 왜장쳐 노래부를 뿐입니다.

이른 봄이면 유럽이 고향인 너도밤나무 앞에 쌓인 눈 사이로 노루귀가 꽃을 피워 올립니다. 산사나무와 산수유나무가 봄꽃을 피우기 전에 낮은 땅에서는 외래종 초본식물인 설강화(Snowdrop)가 눈처럼 하얀 꽃을 피우고, 성큼하니 키가 훌쩍 큰 뽕나무에 검붉은 오디가 제 무게를 못이겨 떨어질 즈음, 바로 옆에서는 메론 향을 진하게 풍기는 일본산 '초령목'이 너끈히 자라고 있으며, 우리의 토종나무인 후박나무 곁에서 미국산 별목련과 동백나무가 형형색색의 꽃들을 자랑합니다.

연못 속에서 자라는 낙우송이 있는가 하면, 머나먼 이국 땅에서 들어온 연못가의 낙우송 품종이 땅 위로 기근(氣根: 땅 위로 솟아나는 뿌리를 말함)을 내밀고 있습니다. 울릉도에서 찾아낸 우산고로쇠나무가 뜸직하게 자리잡은 자리 곁에는 노란 색으로 꽃을 피우는 목련이 성큼 자라고 있으며, 고목 줄기에 보랏빛의 꽃을 피우는 캐나다산 박태기나무 곁에는 수양서어나무가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한낮의 낮잠을 즐깁니다.

꽃 한송이의 지름이 무려 40센티를 넘어가는 중국산 목련 뒤로는 바닷바람 맞고 자라는 곰솔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자랐고, 노란 수선화 옹기종기 모여있는 연못가에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어 '복종'이라는 꽃말을 가진 산목련이 다소곳이 자라고 있지요. 눈발 날리는 겨울 솔숲 사이 좁은 오솔길가에는 아프리카산 수선화가 노랗게 겨울을 물들이기도 합니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모래 땅 황무지였던 천리포수목원은 이제 어떤 식물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천혜의 푸른 땅입니다. 풀과 나무 뿐 아니라 그 안에 잦아든 사람까지도 그 안에서는 금세 나무의 푸르름이 배어날 듯합니다. 천리포수목원은 지난 2000년에 세계수목협회에서 지정하는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됐습니다. 세계에서 열두번째의 지정이고, 아시아에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협회의 눈에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자연미가 눈에 띄는 것은 이곳에서 나무를 키우는 원칙에 따라 이뤄낸 아름다움이지요. 여기서는 다른 거개의 수목원들과 달리, 가지치기를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에 맞춘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오로지 식물들 스스로의 살림살이를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길러내는 것이라 해야 하겠지요. 물론 사람의 눈에 맞춘 아름다움도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만으로 일궈낼 수 있는 아름다움 너머에 있는 자연만의 아름다움이 바로 천리포수목원의 아름다움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또다른 아름다움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일궈진 결과들입니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잘게 부순 뒤 가축의 변을 섞어 썩혀서 퇴비를 만들고, 해충이 생기면, 벌레집을 찾아 불태우는 방식으로 방제해온 수목원 사람들의 노력은 지금의 수목원에 천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했지요.

천리포수목원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주말이면, 만리포해수욕장에 바닷바람 쐬러 나오셨던 분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천리포수목원까지 들어오십니다만, 입구에서는 어김없이 수목원 직원들의 "일반인의 관람이 허락되지 않은 곳입니다. 죄송합니다만 관람하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라는 말씀을 듣고 발길을 되돌려야 합니다. 식물 품종의 보존과 연구를 목적으로 한 수목원이고, 또 그렇게 엄격하게 출입을 제한한 까닭에 이리도 빠른 시간에 이토록 아름다운 수목원이 만들어졌음을 모두가 아는 까닭에 이 원칙만큼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 미국인 고 민병갈 원장이 이곳 땅을 매입하면서 시작된 천리포수목원은 79년에 비영리재단법인으로, 96년에 공익법인으로 인가 받아 지금은 재단법인 이사회(이사장 문국현 유한킴벌리 대표)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어느 틈엔지, 나도 그 열 명의 이사회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내게 당혹스러울 정도로 놀랍게 다가왔던 천리포의 그 많은 식물들이 펼치는 수목원 숲 속의 살림살이는 다른 어느 곳에서의 시간보다 훨씬 편안함을 가져다 줍니다. 앞길을 가로막는 엄지 손가락만한 거미 한 마리도, 길섶을 서두르지 않고 넉넉하게 오가는 청솔모의 잰걸음도 그저 편안함을 더해줄 뿐입니다. 그 안에서 가만가만 아주 조용조용하게 움터오는 생명의 귀중한 아름다움이 바로 내가 끝내 부등켜 안아야 할 내 살림살이의 알갱이가 될 것입니다.

수목원 앞 바다로 떨어지는 석양이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면서 바람은 차가워집니다. 다시 '겨울에 피는 목련 리틀 젬'을 바라봅니다. 마치 소슬한 가을 바람에 몸을 움츠리는 듯하지만, 여전히 목련다운 그 품새는 그대로입니다. 자연이 사람과 함께 어우러지는 살림살이를 가능하게 하는 이곳에서의 삶을 우리는 이제 굳게 신뢰하고 이곳의 살림살이를 더 아름답게 꾸며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자연에 이르는 길이고, 자연이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길입니다.

참고: 천리포수목원 홈페이지
http://www.chollipo.org 전화 041-672-9310

끝.
김은희 (2008.04.28 23:13)
천리포수목원..언제한번이라도 가볼수있을지... 소망으로 남깁니다.

언제나 한자리에 서서 영원을 꿈꾸는 식물들처럼, 고규홍님의 새로운 만남... 나무들이 있기에...

저같이 선생님의 컬럼을 보고 들으며 행복해하고 나무를 더 관심있게 볼수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박주영 (2009.08.15 21:35)
우리 할머니도 돌아가실때 나무이름을말하고 돌아가셨어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장현진 (2010.04.08 18:53)
교수님~ 저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먼저 주위에 자라난 작은 나무들을 먼저 돌아보려구요.. ㅎㅎ
김해자 (2012.04.13 18:44)
자연이라는 친구를 찾아내셨었군요 제게도 가장 힘든때 처음깨달은 것이 자연이 있어 자연만 있어도 견딜만하다였습니다
박강희 (2012.06.30 09:17)
한나무를 바라보고도 느낌은 같을수는 없겠지만

한가지 같은것은 마음이 편안해진다는것이지요~~

천리포 수목원 한번 꼭 가보고 싶습니다.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
등록
목록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