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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은?
제목 [해피데이스] 나무처럼 아름답게 늙고 싶다 날짜 2006.10.28 17:15
글쓴이 고규홍 조회 3275

꽤 오래 전에 쓴 글인데, 인터넷에 들어갔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2005년 3월에 썼던 글, 그냥 클리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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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를수록 나무는 점점 더 아름다워집니다. 늙으면서 아름다워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사람도 조금 더 느리게 살아가는 것만이 스스로 아름다움을 갖출 수 있는 유일한 지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간지 기자 생활은 돈의 달콤함을 주었지만, 그 안에는 내가 없었습니다. 인생의 속도전에 휩쓸려 그조차도 모르고 살았지요. 11년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고액 연봉의 직장 대문을 나서자, 가장 먼저 하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천리포 수목원에 들어가 해답 없는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혼자만의 ‘완벽한 고요’를 만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싸락눈 내리는 겨울 아침에 목련나무를 멍하니 보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꽃이 피지 않았겠습니까. 멈췄다고 생각했던 그 겨울 나무에 느릿하게 생명이 흐르고 있었던 겁니다. 건널목조차 ‘걸어서’ 건너본 적 없이 살던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나무에 매료되어 그 세월의 깊이를 찾아 나선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전국을 떠돌며 나무를 껴안던 지난날들은 내 잃어버린 시간과 세월, 본연의 삶을 되찾으려는 안간힘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주 화요일과 수요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무 순례에 나섭니다. 나무를 찾아다니는 일은 언제나 ‘다음’이 예정되게 마련입니다. 꽃피는 봄에는 싱그러운 열매의 가을을 기다려야 하고, 잎 무성한 여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의 가을을 기대해야 하며, 낙엽 지는 가을이면 벌거벗은 채 빈 들에 홀로 서 있는 나무의 쓸쓸함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나무와 함께 하는 마음은 그래서 서두를 수 없습니다.

 

한 해에 꼭 한 번은 얼굴을 봐야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남양주 양수리의 두물머리에서 마치 시골집 무뚝뚝한 할배 영감처럼 말없이 서 있는 느티나무입니다. 그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이야기가 주절주절 흘러나옵니다. 그동안 있었던 기쁘고 슬픈 일, 즐겁고 괴로웠던 일들을 할배에게 허물없이 털어놓는 식이지요. 바쁘게 달려오느라 가빠진 숨이 차분해지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수백 년을 살아온 나무와 숨결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숨조차 빠르게 쉴 수 없습니다.

 

해가 산 너머로 떨어질 무렵, 할배나무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 어김없이 뒤꼭지를 채는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밥 잘 챙겨먹고 길 조심하거라.”

 

나무 한 그루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주 짧아야 일년이 걸립니다. 철마다 바꾸는 나무의 표정은 물론이고, 그를 둘러싼 산과 들의 풍경에 따라서도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침에 찾아가 나무의 표정을 사진에 담고는 못내 아쉬워 삼각대 세웠던 자리를 표시해두고 돌아선 다음, 해거름에 다시 찾아갑니다. ‘아! 어찌 저리도 표정이 새로울 수 있는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다시 찾았건만 표정과 자태는 변화무쌍, 그 자체입니다. 사람의 잰 걸음과 성마른 마음으로는 눈치 채기 힘들 만큼 편안하고도 느리게 살아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모습과 표정으로 사람 앞에 다가섭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무는 점점 더 아름다워집니다. 늙으면서 아름다워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늘 변함없는 나무를 보며, 사람도 조금 더 느리게 살아가는 것만이 스스로 아름다움을 갖출 수 있는 유일한 지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즘 나는 프리랜서로 뉴스 사이트를 관리하고 여기저기 나무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면서 그럭저럭 먹고 삽니다. 조직을 벗어나니 ‘생존’을 위한 생활이 고달파진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보고 싶은 나무를 만나러 다니고, 삶의 지혜를 얻고 매순간을 호흡하는 여유와 자유가 내게는 더 소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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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상 (2006.11.01 15:08)
아름다우십니다
고규홍 (2006.11.01 21:21)
아. 태상 군. 학교 갈 때마다 생각나는데, 이렇게 글로 인사하게 되네요. 잘 지냅시다.
유선영 (2007.11.27 21:33)
나무를 찾아 여행을 다니면서 그간 제가 느꼈던 감정을 선배님의 글에서 보게 되니 묘한 느낌이 드네요. 세월이 흐르면서 더 아름다워지는 존재들...나무는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김은영 (2008.09.04 16:11)
교수님...'생존'을 위한 생활이 고달펴진 면이 있지만, 후회하지 않고 여유를 찾는 모습에 감동,ㅋㅋ

저에게도 이런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을 해봐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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