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ro > 고규홍은?
고규홍은?
제목 [서강옛집] 맑은 날, 나무들 곁에 서다 날짜 2006.10.20 10:13
글쓴이 고규홍 조회 3632

맑은 날, 나무들 곁에 서다

 

고규홍(79.국문) 나무칼럼니스트

 

하늘이 투명하게 코발트빛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아침, 몇 가지 밀린 일거리에 매달려 컴퓨터를 켜지만,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쉽게 만나지지 않는 파란 하늘 아래 작업실이라는 작은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게 '죄(罪)'처럼 느껴지는 때문이다.

 

예정이 없었다 하더라도, 하늘이 맑게 열리면, 길을 나서야 하는 게 내 일이다. 떠미는 이 하나 없어도 한 그루의 나무를 찾아 나서야 한다.

 

때로는 햇살의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나무의 다양한 표정을 읽어내기 위해 늙은 나무 앞에서 온 종일을 머물러야 하는 일도 있다. 또 개화(開花)기를 놓쳐 이듬해 봄까지 내내 한 그루의 나무를 그리워하며 가슴을 설레는 것도 다반사다. 순백의 눈송이가 얹혀진 독야청청 푸르른 소나무의 안부가 궁금해 눈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때도 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대가가 확실히 보장된 일도 아니건만, 이제는 맑은 날 길을 나서지 않는 걸 죄로 느껴야 할 만큼 나무를 찾아 떠도는 일은 내 일이 되고 말았다.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무와 사람살이의 관계를 찾아내, 글과 사진으로 엮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 마음먹은 것은 99년 중앙일보의 기자직을 내던진 무모함과 다르지 않았다. 식물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식물에 대한 청맹과니였으니 말이다.

 

무모함을 부추긴 아름다운 사람 하나 있다. 나무를 감상의 대상으로만 보지말고, 그 안에 빠져 들어보라는 알듯 말듯한 이야기. 나는 더 깊은 무모함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다시 돌아나가기 힘들만큼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그이는 지금 내 대신 가정의 생계를 도맡아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아내다.

 

7년 동안 책도 여러 권 냈다. 올해는 두 권이나 더 나올 예정이다. 또 버려지다시피 한 나무 한 그루를 찾아내 문화재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한 일도 있다. 그 나무는 지난 4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개인이 한 일로는 흔치 않다며 여러 매스컴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올 봄에는 신문 방송 인터넷 등, 유난히 나를 찾는 미디어가 많았다. 몇몇 라디오 방송에 고정으로 나가기도 한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나무를 찾은 것이겠다. 나무에 대해 크게 늘어난 관심을 나를 통해 이야기하려는 뜻임에 틀림없다. 즐겁다. 내가 찾아다니는 나무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 깊숙이 자리잡는다는 것, 그것이 내가 7년 전 처음 이 일을 하게 된 뜻이었음을 잊지 않는 까닭이다.

 

이제 컴퓨터를 끄고 길을 나서야 할 시간이다.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자리잡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큰 나무, 그가 아름답게 잘 살 수 있는 그 곳이야말로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곳이다. 버릴 수 없는 나의 소중하고도 자랑스러운 일터다.

 

원문 보기

손귀자 (2009.04.01 21:49)
부천 엘지 백화점에서 선생님과 만났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고 오랜만에 현자 한분을 만난 느낌이었다

남자가 저렇게 멋있을수도 있구나 오늘은 책 두권을 주문했다 아니 농부철학자까지 세권이다

베토벤의 가계부랑 주말에 뭔데 나무이야기다 책이 기달려진다
최정필 (2009.08.09 16:27)
08-09 나무 컬럼리스트...

나무와 사람살이의 관계....

나무에 빠지다...

아름다운 삶이네요...
홍성찬 (2009.09.21 22:20)
'고규홍(79.국문) 나무칼럼니스트 '라고 되어 있는데, 79학번임을 나타낸 것인듯 합니다만 자칫, 79세로 오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고규홍 (2009.12.14 11:22)
아. 그렇네요. 79세가 아니라, 79학번인데, 그 매체에 표기된 것을 그대로 옮겨놓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염영자 (2011.03.03 12:16)
'나'는 누구인가.

이글 하나만 읽어도 마치 선생님을 뵌듯합니다.

각별한 나무 사랑이 결코 긴 세월을 나무에 쏟았다고 해서 생겨나는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솔숲을 방문하며 선생님께서 가셨던 길을 저는 다른 나라 미국에서 시작해 보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바로 적기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김우황 (2012.03.14 15:55)
가슴이 잔잔하고 포근한 느낌이드네요
박강희 (2012.06.30 09:45)
우연히지만 고규홍나무박사님을 이렇게라도 접하게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내용들을 찬찬히 읽어볼랍니다.
안미령 (2012.09.23 23:39)
아름답습니다.
김인옥 (2014.06.07 14:15)
방송에서 고규홍나무박사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는데 어떻게 생긴 분일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마침 시민청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수강하게 되었는데 첫강의를 듣고 라디오에서 듣던 것보다 더 재미있고 열정적인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으로 한국의 나무 특강을 사서 하룻만에 읽고 다음 강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연인 고규홍 요즘 보기 드물게 멋있는 분이더군요 삭제
고규홍 (2014.06.07 15:14)
그렇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무 앞에 더 오래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
등록
목록 쓰기